삼현파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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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0대 정조대왕께서 김해김씨를 가리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하시며

절 효 공(節孝公) 휘 극일(克一) 53세손

문 민 공(文愍公) 휘 일손(馹孫) 55세손

손삼족당(三足堂) 휘 대유(大有) 56세손

세 현인을 가리켜 3현(賢)이라 한다. 한 집안에서 4대간에 3현이 났다는 일은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로 정한 것이다

 

m02.png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우리 김해김씨를 삼한의 갑족이라 함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걸출한 인재와 명사가 많다는 데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 가운데 조선조 초기 4대에 걸쳐 삼현공(三賢公)이 있어 삼현파(三賢派)라 하였으니, 학문과 효행에는 절효공(節孝公)이요,

충직에는 탁영공(濯纓公)이요, 덕행의 문신(文臣)에는 삼족당공(三足堂公)이다.

 

m02.png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 3715~3789:1382~1456)

공의 자는 용협(用協)이요 호는 모암(慕菴)이요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극진하기로 칭송을 받았으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조선 초기의 효자이며 학자이다. 어려서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고, 장성하여서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인 장인(丈人) 이간(李暕)이 벼슬을 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으나 양친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양친이 돌아가심에 깊은 산속에서 지극 정성으로 6년 동안을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맹수(猛獸)들도 곁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특히 자손의 교육에 힘써서 아들은 물론 손자들의 교육까지 직접 맡아 손자인 준손(駿孫) · 기손(驥孫) · 일손(馹孫)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이름을 떨쳐 김씨삼주(金氏三珠)라는 호칭을 듣게 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세종 때 벼슬이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이르렀다. 청도군수 이기(李企)의 추대에 의하여 조정으로부터 효자의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지고, 성종 13년 임인(壬寅 3815:1482)에는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효자문비(孝子門碑)가 세워졌다. 청도(淸道)의 자계서원(紫溪書院) 존덕사(尊德祠)에 배향되었다.

 

m02.png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 3797~3831:1464~1498)

공의 자는 계운(季雲)이요 호는 탁영(濯纓)이요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17년 병오(丙午 3819:1486)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을 닮아 문장에 능하였고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성종조(成宗朝)때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실 그대로 적었다. 그 뒤에도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붕당을 만들어 정쟁(政爭)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사기도 하였다.

 

연산군 4년 무오(戊午 3831:1498)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이극돈이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탁영공은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는데, 이것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음을 간접적으로 비방한 내용이라며 유자광 ·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 친국(親鞫) 후 사형을 당했고,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이 죽거나 혹형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일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사림파의 신진 사류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세력을 잃게 되었다. 중종반정(3839:1506) 이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청도의 자계서원 존덕사에 배향되었다.

 

m02.png 삼족당공(三足堂公) 김대유(金大有 3812~3884:1479~1551)

공의 자는 천우(天佑)요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니, 직제학(直提學) 준손(駿孫)의 아들이며 정여창(鄭汝昌)의 문인이다. 연산 무오사화로 숙부(叔父) 탁영공(濯纓公)이 사형에 처해지자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 되었다가 중종 1년 병인(丙寅 3839:1506) 풀려났다.

그 이듬해 진사시(進士 試)에 급제하고, 중종 13년 무인(戊寅 3851:1518) 품행과 도의가 뛰어난 은사로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중종 14년 기묘(己卯 3852:1519) 현량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 호조좌랑(戶曹佐郞) ·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 칠원 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파방(罷)되자 관작(官爵) · 과제(科第)를 삭탈당하여 고향에서 지내다가, 인종1년 을사(乙巳 3878:1545) 복과(復科)되면서 성균관 전적에 재 서용되어 상경 도중에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국과 도량이 뛰어나며 견문이 풍부하고 학식이 고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의 행적이 해동 명신록(海東名臣錄)에 실려 있고, 청도의 자계서원 존덕사에 배향되었다.

 

 

조선조 20대 정조대왕께서 김해김씨를 가리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하시며

절 효 공(節孝公) 휘 극일(克一) 53세손

문 민 공(文愍公) 휘 일손(馹孫) 55세손

손삼족당(三足堂) 휘 대유(大有) 56세손

세 현인을 가리켜 3현(賢)이라 한 집안에서 4대간에 3현이 났다는 일은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로 정한 것이다

 

m02.png 삼현파의 삼현공(三賢公)

우리 김해김씨를 삼한의 갑족이라 함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걸출한 인재와 명사가 많다는 데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 가운데 조선조 초기 4대에 걸쳐 삼현공(三賢公)이 있어 삼현파(三賢派)라 하였으니, 학문과 효행에는 절효공(節孝公)이요,

충직에는 탁영공(濯纓公)이요, 덕행의 문신(文臣)에는 삼족당공(三足堂公)이다.

 

m02.png 절효공(節孝公) 김극일

   (金克一 3715~3789:1382~1456)

공의 자는 용협(用協)이요 호는 모암(慕菴)이요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극진하기로 칭송을 받았으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조선 초기의 효자이며 학자이다.어려서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고, 장성하여서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인 장인(丈人) 이간(李暕)이 벼슬을 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으나 양친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양친이 돌아가심에 깊은 산속에서 지극 정성으로 6년 동안을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맹수(猛獸)들도 곁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특히 자손의 교육에 힘써서 아들은 물론 손자들의 교육까지 직접 맡아 손자인 준손(駿孫) · 기손(驥孫) · 일손(馹孫)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이름을 떨쳐 김씨삼주(金氏三珠)라는 호칭을 듣게 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세종 때 벼슬이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이르렀다. 청도군수 이기(李企)의 추대에 의하여 조정으로부터 효자의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지고, 성종 13년 임인(壬寅 3815:1482)에는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효자문비(孝子門碑)가 세워졌다. 청도(淸道)의 자계서원(紫溪書院) 존덕사(尊德祠)에 배향되었다.

 

m02.png 탁영공(濯纓公)김일손

   (金馹孫 3797~3831:1464~1498)

공의 자는 계운(季雲)이요 호는 탁영(濯纓)이요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17년 병오(丙午 3819:1486)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을 닮아 문장에 능하였고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성종조(成宗朝)때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실 그대로 적었다. 그 뒤에도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붕당을 만들어 정쟁(政爭)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사기도 하였다.

 

연산군 4년 무오(戊午 3831:1498)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이극돈이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탁영공은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는데, 이것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음을 간접적으로 비방한 내용이라며 유자광 ·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 친국(親鞫) 후 사형을 당했고,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이 죽거나 혹형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일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사림파의 신진 사류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세력을 잃게 되었다. 중종반정(3839:1506) 이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청도의 자계서원 존덕사에 배향되었다.

 

m02.png 삼족당공(三足堂公)김대유

   (金大有 3812~3884:1479~1551)

공의 자는 천우(天佑)요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니, 직제학(直提學) 준손(駿孫)의 아들이며 정여창(鄭汝昌)의 문인이다. 연산 무오사화로 숙부(叔父) 탁영공(濯纓公)이 사형에 처해지자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1년 병인(丙寅 3839:1506) 풀려났다.

그 이듬해 진사시(進士 試)에 급제하고, 중종 13년 무인(戊寅 3851:1518) 품행과 도의가 뛰어난 은사로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중종 14년 기묘(己卯 3852:1519) 현량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 호조좌랑(戶曹佐郞) ·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 칠원 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파방(罷榜)되자 관작(官爵) · 과제(科第)를 삭탈당하여 고향에서 지내다가, 인종1년 을사(乙巳 3878:1545) 복과(復科)되면서 성균관 전적에 재 서용되어 상경 도중에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국과 도량이 뛰어나며 견문이 풍부하고 학식이 고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의 행적이 해동 명신록(海東名臣錄)에 실려 있고, 청도의 자계서원 존덕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