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당공(白棠公) 입향(入鄕)의
경위
호남의 명문으로 뿌리내린 백당공(白棠公) 후손인 우리 김해김씨는 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씨족이다.
해남에 입향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가락국 시조대왕의 56세 원손인 백당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백당공의 휘는 하(河)요 초휘는 대성(大成)이요 자는 경호(景浩)이니, 성종 22년 신해(辛亥 3824:1491) 8월 15일에 경상도 청도군(淸道郡) 화양면(華陽面)에서 탄생하였다. 연산군 4년 무오(戊午 3831:1498) 나라에서는 숙부인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유자광 ·
이극돈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는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묘를 파헤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탁영공도 사형을 당하였다.
탁영공의 자질(子姪)인 공은 삼족을 멸하는 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그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유모 신씨의 등에 업혀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나 남원을 거쳐 광주에서 2년여를 살다가 다시 남쪽 땅끝 외진 고을인 해남으로 옮겨 잠시 피신하려다가 우거(寓居)하게 된 곳이 해남군 해남읍 고도지(古道旨)이다.
물설고 낯설은 타관객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모 신씨의 각별한 보살핌 밑에서 성장하여 밀성박씨(密城朴氏)를 배위로 맞아 3형제를 두었으니, 백일(百鎰) · 천일(千鎰) · 만일(萬鎰)이다.
자나깨나 무오사화에 연루된 자질임이 노출될까 봐 마음을 조이며 지내야만 하였다. 또한 피신하여 올 당시 가승(家乘)으로 된 문적을 지참하고 있었으나 그 가승을 몰래 보관하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일 자손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극비리에 현 해남읍 용정리(龍井里) 소재 남곽산(南郭山) 어느 바위틈에 숨겨 두었다고 구전(口傳) 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가승을 찾지
못한 채 유모 신씨의 유언에 따라 족보를 편찬해 오고 있다.
지난 500여년 동안 백당공 후손인 우리 김해김씨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산화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기도 하였고,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다하기도 하였고, 문과(文科)에 당당히 급제하여 우리 가문을 빛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고장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오순도순 살아왔기에 실전(失傳)된 선영(先塋)도 없고 세대의 계통도 일사불란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백당공의 후손인 우리 김해김씨는 이처럼 뿌리 깊은 역사 속에 거룩한 선조가 끊이지 않는 가문을 형성하여 왔으니, 앞으로도 왕손의 후예로서 떳떳하고 뿌듯한 자부와 긍지를 갖고 자자손손 면면히 이어가리라 확신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燕山君) 4년 무오(戊午 3831:1498)에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ᆞ이극돈(李克墩)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화이다.
이 사화는 4대 사화의 제일 첫 사화로 사초(史草) 문제로 발단이 되었다 하여 「史禍」라고도 쓴다. 조선조 초기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는데 공이 많았던 훈구파(勳舊派)들이 정사를 독차지하고 있었고, 고려(高麗)의 유신(遺臣)들은 은퇴하여 고향의 후진 양성에 힘씀으로 인하여 시골의 문인 · 학자인 사림파(士林派)가 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성종은 왕위에 올라 훈구파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관리들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이 때부터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와 젊은 선비들이 관계(官界)의 요직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3사(三司 : 司諫院 ・司憲府 · 弘文館)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사림파가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며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 귀족으로 보고 사림(士林)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며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파의 김종직과 훈구파의 유자광은 일찍부터 개인적으로도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의 비행을 샅샅이 사초에 기록한 일로 해서 김일손과 이극돈의 사이에도 틈이 생기고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유자광과 이극돈은 신진 사류인 사림파를 증오하는 마음이 일치하여 보복하기에 착수하였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이극돈이 실록청(實錄廳)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내용이라고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이때 유자광. 이극돈 · 노사신(盧思愼) 등이 사림파를 축출하는데 앞장섰으니, 연산군은 김일손을 문초한 후 사형에 처하고,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었다. 이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김종직(金宗直) 지음
〈역문(譯文)〉
세조 3년 정축(丁丑 3790:1457)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풍채가 좋고 의젓한 모습을 갖춘 신인(神人)이 임금의 복장을 하고 다가와서 하는 말이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인 항우(項羽)에게 죽인 바가 되어 오랜 세월을 침강(郴江)의 물속에 잠겨 있노라”
라고 말하고는 언뜻 보이더니 바로 없어져 버렸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크게 놀라면서 이르기를
“회왕은 중국의 남쪽 초나라 사람이요, 나는 조선국 사람으로 지리적인 거리가 10,000여리나 되고,
시대의 선후도 또한 1,000년이 훨씬 넘는데 꿈에 현몽을 하다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인가?
또한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회왕을 죽여 강물에 던졌다는 말을 찾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회왕을 저격하여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단 말인가?" 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마침내 이 글을 지어 그를 위로하노라.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인간에게 줌이여
누구인들 천지도왕(天 · 地 · 道 · 王)과 인의예지신(仁 · 義 · 禮 · 智 · 信)이 높은 줄을 모르리요?
중국에서만 잘 행하고 우리나라라고 소홀히 한 바 아님이여
어찌하여 옛적에만 있었고 지금이라고 없을 손가?
나는 조선국 사람이요, 또 1,000년 뒤에 태어남이여
공손히 초나라 회왕을 위하여 조문하노라.
옛날 진시황이 폭력을 휘두름이여
사해의 물결이 크게 흔들리니, 비록 두렁허리와 미꾸라지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하였으리라
당시 제(齊) · 초(楚) · 연(燕) · 한(韓) · 위(魏) · 조(趙)의 백성들이여
숨거나 도망가서 겨우 나약한 평민뿐이네 남쪽나라 장수의 후예인 항량(項梁)이 비록 길조를 얻었다고 일을 일으키는가?
왕위를 얻어 백성의 소망을 따름이여 초나라 시조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옥새(玉璽)를 잡고 나라를 다스림이여
천하에 미씨(羋氏)보다 높은 이가 없어라
(단종(端宗)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방(劉邦)을 보내어 관중에 들어감이여
또한 족히 인의(仁義)를 보이누나
사납게 마음대로 관군을 죽임이여
(세조(世祖)가 김종서(金宗瑞)를 죽임의 비유)
어찌하여 정벌하는 도끼에 기름칠을 않았느뇨?
(단종이 세조를 축출하지 못함의 비유)
아! 형세가 너무 궁색함에 있음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송구할 뿐이네
젓갈과 포가 되어 도리어 씹힘을 당함이여
어찌타 하늘이 정한 운수도 어긋나는가
(단종이 세조에게 쫓겨나게 됨의 비유)
침현(縣)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을 찌름이여
그림자는 해를 가리어 밤인 듯 어둡고
침현의 물이 밤낮 없이 흐름이여
물결만 넘실대며 돌아올 줄 모르는가
천지가 영원하듯 끝없는 이 한이여
넋은 지금도 허공에 떠도누나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회왕이 갑자기 꿈속에서 나타났네
주자(朱子)의 필법(筆法)을 따름이여
생각할 적마다 우러러 사모하노라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강신(降神)함이여
바라오니 영령 (英靈)께서는 흠향하소서
선무랑(宣務郎) 백당김공(白棠金公) 묘갈명(墓碣銘)
〈역문(譯文)〉
공의 휘(諱)는 하(河)요 초휘(初諱)는 대성(大成)이요 자(字)는 경호(景浩)이니, 세계(世系)는 금관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56세 후예이다.
자신의 호를 백당(白棠)이라 하였다. 공은 어린 나이에, 연산(燕山) 무오사화(戊午士禍3831:1498)를 피하여 유모 신씨를 따라 남원 · 광주를 거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 곳에 피신하여 임시로 살았는데 자손들도 그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음직으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된 조정의 부름에 나가지 않았고 선무랑(宣務郞)에 증직되었다.
배(配)는 영인(令人)으로 밀성박씨(密城朴氏)인 현감(縣監) 영상(英祥)의 딸이다.
장자의 휘는 백일이니 참봉(參奉)이요, 차자의 휘는 천일(千鎰)이니 병절교위 (秉節校尉)요, 3자의 휘는 만일(萬鎰)이다. 백일(百鎰)의 장자 휘는 연수(延壽)이니 참봉이요, 차자의 휘는 연년(延年) · 연령(延齡) · 연생(延生)이다. 천일(千鎰)의 아들 휘는 연명(延命)이니 참봉이다.
연수(延壽)의 아들 휘는 안방(安邦) · 안민(安民)이요, 연년(延年)의 아들 휘는 안우(安宇)이다.
안방(安邦)의 자는 응시(應時)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일찍이 중봉 조헌(重峰 趙憲)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쌓아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 · 송호 백진남(松湖 白振南)과 더불어 우의가 깊었으며, 선조(宣祖) 38년 을사(乙巳3938:1605)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이다.
안우(安宇)의 자는 화국(華國)이요, 호는 지촌(智村)이니 생원이다.
안방 아들의 휘는 선지(銑之) · 연지(鍊之) · 정지(鋥之) · 여지(麗之)이니, 선지의 자는 여휘(汝輝)요, 호는 제남(濟南)이니 무과에 급제하였고, 연지의 자는 정숙(精叔)이요, 號는 송은(松隱)이니 진사이다.
강서공(岡西公)은 임진왜란(3925: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과 합세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3930:1597) 때는 지촌공(智村公)과 더불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제남공(濟南公)은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추천으로 곡포 만호(曲浦萬戶)에
제수되어 왜적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한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오르게 되어 철권을 받았고, 정유재란 때의 큰 전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에 특배되었으나 부임하지도 못한 채 노량해전에서 전몰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3969:1636)때는 강서공 · 송은공 · 지촌공이 짚자리를 이슬이 내리는 밖에 펴놓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을 다짐한 뒤, 모의청 설치를 문서로 먼저 도차사(都差使)에게 보고하고 가산(家産)을 출연(出捐)하여 군량미를 보조하였다.
송은공(松隱公)은 의병을 규합하여 도내의 제공(公)들과 함께 청주까지 출전하였는데, 뜻밖에 치욕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시를 지어 지절(志節)을 나타내었다. 고향에 돌아와 손수 소나무를 심어 집의 이름을 노송정(老松亭)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노송리(老松里)라 하였고,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서 좌우에 걸어놓고 여생을 마쳤으니, 세간에서는 일문사절(一門四節)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정조조(正祖朝)에는 유림들이 나서서 증직을 상소하였다.
제남공의 6대손 재일(載一)은 문과에 입격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요, 낙일(洛一)은 문과에 입격한 예조정랑(禮曹正郞)이다.
아! 공의 후손이 지금까지 10여대이지만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강서공 · 지촌공 · 제남공 · 송은공의 혁혁한 공훈과 정절(貞節)을 이렇게 찬연히 상고할 수 있어 가히 백세를 풍동(風動)하고 격려할 만하되 후손이 한미하여 현양한 사람이 없으니, 하늘인들 어찌 후손들로 하여금 선조가 남긴 복을 받게 하지 않겠는가?
백당공 16대손 김영일(金永逸) 근역(謹譯)
백당공(白棠公) 입향(入鄕)의
경위
호남의 명문으로 뿌리내린 백당공(白棠公) 후손인 우리 김해김씨는 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씨족이다.
해남에 입향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가락국 시조대왕의 56세 원손인 백당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백당공의 휘는 하(河)요 초휘는 대성(大成)이요 자는 경호(景浩)이니, 성종 22년 신해(辛亥 3824:1491) 8월 15일에 경상도 청도군(淸道郡) 화양면(華陽面)에서 탄생하였다. 연산군 4년 무오(戊午 3831:1498) 나라에서는 숙부인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유자광 ·
이극돈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는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묘를 파헤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탁영공도 사형을 당하였다.
탁영공의 자질(子姪)인 공은 삼족을 멸하는 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그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유모 신씨의 등에 업혀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나 남원을 거쳐 광주에서 2년여를 살다가 다시 남쪽 땅끝 외진 고을인 해남으로 옮겨 잠시 피신하려다가 우거(寓居)하게 된 곳이 해남군 해남읍 고도지(古道旨)이다.
물설고 낯설은 타관객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모 신씨의 각별한 보살핌 밑에서 성장하여 밀성박씨(密城朴氏)를 배위로 맞아 3형제를 두었으니, 백일(百鎰) · 천일(千鎰) · 만일(萬鎰)이다.
자나깨나 무오사화에 연루된 자질임이 노출될까 봐 마음을 조이며 지내야만 하였다. 또한 피신하여 올 당시 가승(家乘)으로 된 문적을 지참하고 있었으나 그 가승을 몰래 보관하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일 자손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극비리에 현 해남읍 용정리(龍井里) 소재 남곽산(南郭山) 어느 바위틈에 숨겨 두었다고 구전(口傳) 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가승을 찾지
못한 채 유모 신씨의 유언에 따라 족보를 편찬해 오고 있다.
지난 500여년 동안 백당공 후손인 우리 김해김씨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산화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기도 하였고,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다하기도 하였고, 문과(文科)에 당당히 급제하여 우리 가문을 빛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고장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오순도순 살아왔기에 실전(失傳)된 선영(先塋)도 없고 세대의 계통도 일사불란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백당공의 후손인 우리 김해김씨는 이처럼 뿌리 깊은 역사 속에 거룩한 선조가 끊이지 않는 가문을 형성하여 왔으니, 앞으로도 왕손의 후예로서 떳떳하고 뿌듯한 자부와 긍지를 갖고 자자손손 면면히 이어가리라 확신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燕山君) 4년 무오(戊午 3831:1498)에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ᆞ이극돈(李克墩)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화이다.
이 사화는 4대 사화의 제일 첫 사화로 사초(史草) 문제로 발단이 되었다 하여 「史禍」라고도 쓴다. 조선조 초기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는데 공이 많았던 훈구파(勳舊派)들이 정사를 독차지하고 있었고, 고려(高麗)의 유신(遺臣)들은 은퇴하여 고향의 후진 양성에 힘씀으로 인하여 시골의 문인 · 학자인 사림파(士林派)가 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성종은 왕위에 올라 훈구파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관리들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이 때부터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와 젊은 선비들이 관계(官界)의 요직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3사(三司 : 司諫院 ・司憲府 · 弘文館)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사림파가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며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 귀족으로 보고 사림(士林)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며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파의 김종직과 훈구파의 유자광은 일찍부터 개인적으로도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의 비행을 샅샅이 사초에 기록한 일로 해서 김일손과 이극돈의 사이에도 틈이 생기고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유자광과 이극돈은 신진 사류인 사림파를 증오하는 마음이 일치하여 보복하기에 착수하였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이극돈이 실록청(實錄廳)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내용이라고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이때 유자광. 이극돈 · 노사신(盧思愼) 등이 사림파를 축출하는데 앞장섰으니, 연산군은 김일손을 문초한 후 사형에 처하고,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었다. 이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김종직(金宗直) 지음
〈역문(譯文)〉
세조 3년 정축(丁丑 3790:1457)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풍채가 좋고 의젓한 모습을 갖춘 신인(神人)이 임금의 복장을 하고 다가와서 하는 말이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인 항우(項羽)에게 죽인 바가 되어 오랜 세월을 침강(郴江)의 물속에 잠겨 있노라”
라고 말하고는 언뜻 보이더니 바로 없어져 버렸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크게 놀라면서 이르기를
“회왕은 중국의 남쪽 초나라 사람이요, 나는 조선국 사람으로 지리적인 거리가 10,000여리나 되고,
시대의 선후도 또한 1,000년이 훨씬 넘는데 꿈에 현몽을 하다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인가?
또한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회왕을 죽여 강물에 던졌다는 말을 찾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회왕을 저격하여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단 말인가?" 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마침내 이 글을 지어 그를 위로하노라.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인간에게 줌이여
누구인들 천지도왕(天 · 地 · 道 · 王)과 인의예지신(仁 · 義 · 禮 · 智 · 信)이 높은 줄을 모르리요?
중국에서만 잘 행하고 우리나라라고 소홀히 한 바 아님이여
어찌하여 옛적에만 있었고 지금이라고 없을 손가?
나는 조선국 사람이요, 또 1,000년 뒤에 태어남이여
공손히 초나라 회왕을 위하여 조문하노라.
옛날 진시황이 폭력을 휘두름이여
사해의 물결이 크게 흔들리니, 비록 두렁허리와 미꾸라지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하였으리라
당시 제(齊) · 초(楚) · 연(燕) · 한(韓) · 위(魏) · 조(趙)의 백성들이여
숨거나 도망가서 겨우 나약한 평민뿐이네 남쪽나라 장수의 후예인 항량(項梁)이 비록 길조를 얻었다고 일을 일으키는가?
왕위를 얻어 백성의 소망을 따름이여 초나라 시조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옥새(玉璽)를 잡고 나라를 다스림이여
천하에 미씨(羋氏)보다 높은 이가 없어라
(단종(端宗)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방(劉邦)을 보내어 관중에 들어감이여
또한 족히 인의(仁義)를 보이누나
사납게 마음대로 관군을 죽임이여
(세조(世祖)가 김종서(金宗瑞)를 죽임의 비유)
어찌하여 정벌하는 도끼에 기름칠을 않았느뇨?
(단종이 세조를 축출하지 못함의 비유)
아! 형세가 너무 궁색함에 있음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송구할 뿐이네
젓갈과 포가 되어 도리어 씹힘을 당함이여
어찌타 하늘이 정한 운수도 어긋나는가
(단종이 세조에게 쫓겨나게 됨의 비유)
침현(縣)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을 찌름이여
그림자는 해를 가리어 밤인 듯 어둡고
침현의 물이 밤낮 없이 흐름이여
물결만 넘실대며 돌아올 줄 모르는가
천지가 영원하듯 끝없는 이 한이여
넋은 지금도 허공에 떠도누나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회왕이 갑자기 꿈속에서 나타났네
주자(朱子)의 필법(筆法)을 따름이여
생각할 적마다 우러러 사모하노라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강신(降神)함이여
바라오니 영령 (英靈)께서는 흠향하소서
선무랑(宣務郎) 백당김공(白棠金公) 묘갈명(墓碣銘)
〈역문(譯文)〉
공의 휘(諱)는 하(河)요 초휘(初諱)는 대성(大成)이요 자(字)는 경호(景浩)이니, 세계(世系)는 금관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56세 후예이다.
자신의 호를 백당(白棠)이라 하였다. 공은 어린 나이에, 연산(燕山) 무오사화(戊午士禍3831:1498)를 피하여 유모 신씨를 따라 남원 · 광주를 거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 곳에 피신하여 임시로 살았는데 자손들도 그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음직으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된 조정의 부름에 나가지 않았고 선무랑(宣務郞)에 증직되었다.
배(配)는 영인(令人)으로 밀성박씨(密城朴氏)인 현감(縣監) 영상(英祥)의 딸이다.
장자의 휘는 백일이니 참봉(參奉)이요, 차자의 휘는 천일(千鎰)이니 병절교위 (秉節校尉)요, 3자의 휘는 만일(萬鎰)이다. 백일(百鎰)의 장자 휘는 연수(延壽)이니 참봉이요, 차자의 휘는 연년(延年) · 연령(延齡) · 연생(延生)이다. 천일(千鎰)의 아들 휘는 연명(延命)이니 참봉이다.
연수(延壽)의 아들 휘는 안방(安邦) · 안민(安民)이요, 연년(延年)의 아들 휘는 안우(安宇)이다.
안방(安邦)의 자는 응시(應時)요, 호는 강서(岡西)이니, 일찍이 중봉 조헌(重峰 趙憲)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쌓아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 · 송호 백진남(松湖 白振南)과 더불어 우의가 깊었으며, 선조(宣祖) 38년 을사(乙巳3938:1605)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이다.
안우(安宇)의 자는 화국(華國)이요, 호는 지촌(智村)이니 생원이다.
안방 아들의 휘는 선지(銑之) · 연지(鍊之) · 정지(鋥之) · 여지(麗之)이니, 선지의 자는 여휘(汝輝)요, 호는 제남(濟南)이니 무과에 급제하였고, 연지의 자는 정숙(精叔)이요, 號는 송은(松隱)이니 진사이다.
강서공(岡西公)은 임진왜란(3925: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과 합세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3930:1597) 때는 지촌공(智村公)과 더불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제남공(濟南公)은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추천으로 곡포 만호(曲浦萬戶)에
제수되어 왜적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한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오르게 되어 철권을 받았고, 정유재란 때의 큰 전공으로 보성군수(寶城郡守)에 특배되었으나 부임하지도 못한 채 노량해전에서 전몰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3969:1636)때는 강서공 · 송은공 · 지촌공이 짚자리를 이슬이 내리는 밖에 펴놓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을 다짐한 뒤, 모의청 설치를 문서로 먼저 도차사(都差使)에게 보고하고 가산(家産)을 출연(出捐)하여 군량미를 보조하였다.
송은공(松隱公)은 의병을 규합하여 도내의 제공(公)들과 함께 청주까지 출전하였는데, 뜻밖에 치욕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시를 지어 지절(志節)을 나타내었다. 고향에 돌아와 손수 소나무를 심어 집의 이름을 노송정(老松亭)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노송리(老松里)라 하였고,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서 좌우에 걸어놓고 여생을 마쳤으니, 세간에서는 일문사절(一門四節)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정조조(正祖朝)에는 유림들이 나서서 증직을 상소하였다.
제남공의 6대손 재일(載一)은 문과에 입격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요, 낙일(洛一)은 문과에 입격한 예조정랑(禮曹正郞)이다.
아! 공의 후손이 지금까지 10여대이지만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강서공 · 지촌공 · 제남공 · 송은공의 혁혁한 공훈과 정절(貞節)을 이렇게 찬연히 상고할 수 있어 가히 백세를 풍동(風動)하고 격려할 만하되 후손이 한미하여 현양한 사람이 없으니, 하늘인들 어찌 후손들로 하여금 선조가 남긴 복을 받게 하지 않겠는가?
백당공 16대손 김영일(金永逸) 근역(謹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