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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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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며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이다. 조부는 무력(武力)이요, 아버지는 신라의 명장인 서현(舒玄)이요,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심신을 수련하고 무예를 익혀 용장이며 지장(智將)으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추어, 35세에 낭비성(娘臂城) 싸움에서 아군의 패세를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 군사를 무찔렀다. 그후 백제 및 고구려와의 여러 차례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 김춘추(金春秋)를 임금으로 내세워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려는 준비를 하였다.
태종 무열왕 7년 (2993 ; 660)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13만 대군과 신라의 정병 5만을 연합하여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백제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으려고 유격전이 도처에서 벌여졌고, 고구려는 이들과 연합하여 신라군과 대항하는데 기세를 올렸다. 김유신 장군의 총 지휘 아래 여러 차례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막강한 고구려의 세력에
번번히 성공하지 못하였다.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 8년 (3001 ; 668) 나당(羅唐) 연합군을 편성하여 연합군 대총관(大摠管)이 된 김유신은 금성(金城 ; 지금의 경주)에 남아 있고, 김인문(金仁問) · 김흠순(金欽純) 등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의 옛 영토는 전부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당나라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이 때부터 신라의 총력을 경주하여
당나라와 대항하게 되었다.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하여 백제의 옛 영토를 전부 탈환하였고, 고구려의 일부인 한강(漢江) 이북에서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땅을 도로 찾았으나 북쪽으로 뻗은 광활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영영 잃고 말았다.
신라의 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작위를 주었고, 죽은 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추봉(追封)하였다.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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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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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며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이다. 조부는 무력(武力)이요, 아버지는 신라의 명장인 서현(舒玄)이요,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심신을 수련하고 무예를 익혀 용장이며 지장(智將)으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추어, 35세에 낭비성(娘臂城) 싸움에서 아군의 패세를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 군사를 무찔렀다. 그후 백제 및 고구려와의 여러 차례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 김춘추(金春秋)를 임금으로 내세워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려는 준비를 하였다.
태종 무열왕 7년 (2993 ; 660)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13만 대군과 신라의 정병 5만을 연합하여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백제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으려고 유격전이 도처에서 벌여졌고, 고구려는 이들과 연합하여 신라군과 대항하는데 기세를 올렸다. 김유신 장군의 총 지휘 아래 여러 차례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막강한 고구려의 세력에
번번히 성공하지 못하였다.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 8년 (3001 ; 668) 나당(羅唐) 연합군을 편성하여 연합군 대총관(大摠管)이 된 김유신은 금성(金城 ; 지금의 경주)에 남아 있고, 김인문(金仁問) · 김흠순(金欽純) 등을 주장(主將)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백제·고구려의 옛 영토는 전부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도
당나라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이 때부터 신라의 총력을 경주하여
당나라와 대항하게 되었다.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하여 백제의 옛 영토를 전부 탈환하였고, 고구려의 일부인 한강(漢江) 이북에서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땅을 도로 찾았으나 북쪽으로 뻗은 광활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영영 잃고 말았다.
신라의 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작위를 주었고, 죽은 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추봉(追封)하였다.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배향되었다.